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략 폭격/2차 대전 (문단 편집) ==== 로테르담 공습 ==== [[프랑스 침공]] 작전 당시, 아르덴 숲을 돌파하며 베네룩스 3국을 접수하기 위한 작전 중 독일 공군은 네덜란드의 조기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네덜란드의 대도시인 로테르담을 폭격한다. 일단 독일측에서는 두 번의 권고를 내렸으나 네덜란드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고, 독일군은 로테르담을 포위한 후 도심에 폭격을 가하기로 한다. 당시 포위 작전을 실행하던 지상군이 교전 중이었으나 이들을 지원하는 대신 네덜란드 민간인들을 폭격하기로 한 것. 다만 전투가 진행되는 도중 네덜란드측에서 항복 문서가 도착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로테르담 도심은 불바다가 된다. 물론 폭격 작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는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 폭탄은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독일측의 항변은 일단 폭격을 맞은 부분은 네덜란드군이 주둔한 부분이라고 둘러댔지만 실상은.. 폭격에 동원된 병력은 He 111 폭격기 100대였으며 이 중 57대가 폭탄을 투하했다. 총 97톤의 폭장이 투하되었으며 도심 3 km 반경이 완파되었다. 이 중에는 민간인들을 수용한 4개의 병원과 21개의 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한 번의 폭격으로 대략 1,000명의 민간인 인명 피해가 났고, 그보다 많은 인원이 부상을 당했으며 대략 78,000명이 살 곳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의 25,000 가구의 주택과, 2,320개소의 가게, 62개의 학교가 완파되었다. 전후 독일측 연구 자료에 의하면 영국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대략 30배 이상 피해가 과장되었다[* 다만, 앞에 언급된 수치는 이러한 부풀린 수치를 전부 차감한 것이다.]고 주장되고 있다. 실제로 그 당시 파리에 상주하던 네덜란드 대사관의 자료는 100,000명의 사망자로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후 뉴욕에 상주하는 네덜란드 대사관의 자료에서 30,000으로 대폭 줄어들었고, 당시 세계 언론은 이 30,000 수치를 공식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 수치도 엄청난 것으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로테르담은 [[인외마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사건 직후 영국군도 방침을 바꾸어 민간인 피해를 되도록 피하던 기존의 방침을 뒤로 한 채 본격적으로 독일의 공업 시설을 폭격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도 루르 지방의 제철소 등을 목표로 폭격을 가했는데 당시 폭격 조준기 등이 좋지 않았기에 필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외에 독일의 주 산업도시들 역시 폭격하기 시작했다. 다만 정확도가 낮아서 산업 시설을 제대로 맞추지는 못 했고 도리어 독일 민간인들의 분노만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40년 6월에 프랑스군 폭격기 한 대가 베를린을 폭격하기도 했다. 다만 영국군이 본토 폭격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은 [[프랑스 침공]]이 끝나기 전까지는 영국 본토를 폭격하지 않고 있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최전방을 중요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